[한국 AI의 착시] ② 한국형 챗GPT의 함정

정부·기업 독자 모델 개발 속도 내지만 범용 챗봇 추격전은 비용 부담 커

사진=챗GPT

한국 정부와 한국 주요 기업들이 독자 인공지능(AI) 기반모델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네이버와 LG, 카카오 등은 한국어와 산업 현장에 맞춘 자체 모델을 고도화하고 있고, 한국 정부도 K-AI 기반모델 육성과 그래픽처리장치(GPU·그래픽 연산장치) 확보에 나섰다. 글로벌 AI 경쟁이 모델과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함께 묶는 자본전으로 바뀌면서 한국형 챗GPT 전략의 실효성을 둘러싼 질문도 커지고 있다.

쟁점은 독자 모델의 필요성 자체가 아니다. 한국어와 행정, 금융, 의료, 제조 현장에 맞는 AI 모델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이 크지 않다. 문제는 범용 챗봇 경쟁을 한국 AI 전략의 중심에 놓는 방식이 현실적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 빅테크가 장악한 범용 모델 시장을 정면으로 추격할 경우 막대한 투자 부담에 비해 시장 장악력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한국 기업들, 독자 모델 고도화 속도

한국 기업들도 자체 모델 경쟁에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HyperCLOVA X)를 앞세워 한국어와 기업용 AI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클로바 스튜디오(CLOVA Studio)를 '비즈니스에 최적화된 하이퍼스케일 AI 개발 도구'로 소개하며, 현재 2,000개 이상의 기업과 기관이 활용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이퍼클로바X는 한국의 문화와 맥락을 이해하는 생성형 AI로 제시돼 있다.

LG AI연구원은 엑사원(EXAONE) 계열 모델을 고도화하고 있다. 2025년 공개한 엑사원 4.0은 추론 모드와 비추론 모드를 통합한 모델로, 한국어와 영어에 더해 스페인어까지 지원한다. 모델은 고성능을 겨냥한 32B 모델과 온디바이스용 1.2B 모델로 구성됐다. 범용 챗봇뿐 아니라 산업 현장과 기기 내 AI 적용까지 염두에 둔 구조다.

카카오도 카나나(Kanana) 계열 모델을 통해 복합양식 AI(multimodal AI·여러 형태의 정보를 함께 처리하는 AI)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카카오는 2025년 12월 카나나-v-임베딩(Kanana-v-embedding)을 공개하며 텍스트와 이미지를 동시에 이해하는 이미지 기반 검색 기술을 내세웠다. 이 모델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 맥락 이해를 강점으로 삼고 있으며, 카카오 내부 광고 소재 유사도 분석과 심사 시스템에도 적용됐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한국 정부도 독자 기반모델 확보에 힘을 싣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소버린 AI 기반모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네이버클라우드와 업스테이지, SK텔레콤, NC AI, LG AI연구원 등 5개 팀이 참여한 모델이 미국 비영리 AI 연구기관 에폭AI(Epoch AI)의 '주목할 만한 AI 모델'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2026년까지 누적 3만7,000개의 GPU를 확보하고, K-AI 기반모델을 공개해 제조·국방·문화 등 분야별 AI 서비스로 확산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이처럼 한국에도 모델은 있다. 문제는 모델의 존재가 곧 시장 주도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고도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글로벌 범용 챗봇 시장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만들었는지, 기업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계속 쓰는 산업용 AI 시장을 충분히 열었는지는 아직 확인해야 할 대목이다.

# 범용 모델 경쟁은 자본전으로 이동

글로벌 AI 모델 경쟁은 이미 연구개발 경쟁을 넘어 인프라 경쟁으로 커졌다.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의 ‘2026 AI 인덱스’에 따르면, 2025년 주목할 만한 최전선 모델(frontier model·최첨단 AI 모델)의 90% 이상은 산업계에서 나왔다. 조직의 AI 채택률도 88%에 달했다. 모델 경쟁의 중심이 대학이나 공공 연구소가 아니라 막대한 자본과 컴퓨팅 인프라를 가진 기업으로 옮겨갔다는 뜻이다.

오픈AI의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는 이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오픈AI는 2025년 1월 소프트뱅크, 오라클, MGX와 함께 미국 내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4년간 5,0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초기 투입액만 1,000억 달러 규모다. 오라클,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ARM 등이 기술 파트너로 참여한다. AI 모델 경쟁이 단순 알고리즘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센터와 전력, 클라우드를 묶는 대규모 인프라 경쟁으로 확대된 셈이다.

클라우드 시장의 집중도도 높다. 시너지리서치그룹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기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은 전 세계 클라우드 인프라 서비스 지출의 63%를 차지했다. 생성형 AI 모델을 학습하고 서비스하는 데 필요한 컴퓨팅 자원이 소수 빅테크 플랫폼에 집중될수록 후발 기업의 독자 경쟁은 더 어려워진다.

기업용 AI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로이터는 오픈AI와 앤스로픽(Anthropic)의 매출 경쟁을 분석하며, 오픈AI가 월 20억 달러, 연환산 최소 240억 달러 수준의 매출을 내고 있고 앤스로픽의 연환산 매출도 3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해당 수치는 자체 공개와 시장 추정이 섞여 있어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AI 모델 경쟁이 기업 고객과 매출을 둘러싼 시장 싸움으로 이동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 기업이 범용 챗봇 성능만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조건이 불리하다. 미국 빅테크는 모델과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개발자 생태계,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함께 묶고 있다. 중국도 딥시크(DeepSeek), 알리바바(Alibaba), 바이두(Baidu), 텐센트(Tencent), 화웨이(Huawei)를 앞세워 독자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모델 하나로 경쟁하는 시장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맞붙는 시장으로 바뀐 것이다.

# 쟁점은 모델이 아니라 시장

한국 AI 업계의 과제는 모델 개발을 중단할 것인지가 아니다. 독자 모델은 필요하다. 외산 범용 모델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한국어, 한국 법·제도, 공공 행정, 금융 규제, 의료 기록, 제조 현장 데이터까지 깊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데이터 반출과 개인정보, 보안 문제도 있다. 이 영역에서는 한국형 모델의 필요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다만 한국형 챗GPT라는 표현은 전략을 좁힐 위험이 있다. 범용 검색창이나 대중용 챗봇을 목표로 삼으면 미국 빅테크와 같은 비용 구조에서 경쟁해야 한다. 반면 제조업의 품질 분석, 금융권의 내부 문서 검토, 병원의 의료 기록 요약, 공공기관의 민원·행정 처리, 법률·세무·회계 업무 보조처럼 규제와 보안, 한국어 맥락이 중요한 영역은 한국 기업이 먼저 파고들 수 있는 시장이다.

특히 공공과 금융, 의료, 제조 분야에서는 폐쇄망 AI와 보안형 AI 수요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기업 내부 데이터와 고객 정보를 외부 클라우드로 넘기기 어려운 산업일수록 자체 서버형 AI나 전용 클라우드 기반 모델이 필요하다. 이 시장은 대중용 챗봇보다 눈에 덜 띄지만, 실제 비용 절감과 업무 효율을 기준으로 AI 도입 여부가 결정된다.

정부 정책도 이 방향과 맞물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K-AI 기반모델 개발과 GPU 확보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공공 수요를 열고, 검증 가능한 산업 데이터를 연결하며, 민간이 실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초기 시장을 설계하지 못하면 모델 개발 성과는 연구개발 단계에 머물 수 있다. AI 정책의 성과는 모델 수나 발표 횟수가 아니라 실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쓰이는지로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형 챗GPT의 함정은 독자 모델 자체에 있지 않다. 모델을 만들면 곧 시장이 열린다는 믿음에 있다. 모델은 출발점일 뿐이다. 시장은 데이터와 업무, 보안과 비용, 신뢰와 유통망이 맞물릴 때 열린다. 아무리 좋은 모델도 기업과 기관의 업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기술 시연에 그친다.

한국형 AI가 이름값을 하려면 채팅창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제조 현장의 불량률을 낮추고, 금융권의 내부 검토 시간을 줄이며, 병원의 기록 업무를 덜고, 공공 행정의 반복 민원을 줄이는 쪽에서 먼저 성과를 내야 한다. 한국이 필요한 것은 미국식 범용 챗봇의 복제품이 아니라 한국 산업과 제도 안에서 실제로 쓰이는 A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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