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AI의 착시] ④한국 AI의 승부처는 채팅창이 아니라 공장이다

제조업 기반은 강하지만 데이터 표준화·현장 인력·중소기업 확산이 병목

사진=챗GPT

인공지능(AI) 경쟁의 무대가 채팅창 밖으로 넓어지고 있다. 기업들은 AI를 고객 응대나 문서 작성에만 쓰지 않는다. 생산라인의 불량을 줄이고, 설비 고장을 예측하며, 에너지 사용량과 공정을 최적화하는 쪽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 때문에 제조업은 한국 AI 전략에서 가장 현실적인 적용 무대로 거론된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두텁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철강, 화학 등 주력 산업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핵심 축이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제조업 부가가치 비중은 2024년 국내총생산(GDP)의 26.6%를 기록했다. 서비스와 플랫폼 경쟁에서는 미국 빅테크에 밀리지만, 산업 현장과 생산 데이터에서는 한국이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 적지 않다.

문제는 제조업 기반이 곧바로 제조 AI 경쟁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공장에는 데이터가 있지만, AI가 학습하고 판단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된 데이터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대기업 생산라인과 중소 제조 현장 사이의 디지털 격차도 크다. 제조 AI의 성과는 기술 시연보다 현장 확산 여부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 글로벌 기업들, 예지보전·품질검사·공정 자동화에 AI 적용

글로벌 산업계에서 제조 AI는 주요 투자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5년 보고서에서 첨단 제조기업들이 AI를 예지보전(Predictive Maintenance·설비 고장 사전 예측), 품질관리(Quality Control·품질검사), 생산공정 자동화에 주로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 현장의 AI 도입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맥킨지의 2025년 글로벌 AI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8%가 소속 조직에서 최소 한 개 업무 기능에 AI를 정기적으로 사용한다고 답했다. 다만 전사 차원에서 AI를 확산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약 3분의 1에 그쳤다. AI 사용은 넓어졌지만, 실제 업무 구조를 바꾸는 단계까지 간 기업은 아직 제한적이라는 뜻이다.

제조업에서는 이 간극이 더 크다. AI를 생산라인에 적용하려면 설비 데이터, 품질 데이터, 작업자 경험, 공정 조건을 함께 묶어야 한다. 센서와 장비는 있어도 데이터 형식이 제각각이면 AI 적용은 늦어진다. 현장 작업 방식과 안전 기준, 납기와 원가 구조까지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소프트웨어 도입보다 복잡하다.

최근에는 피지컬 AI(Physical AI·물리적 인공지능)도 제조업의 새 화두로 떠올랐다. WEF는 피지컬 AI를 로봇이 실제 환경을 인식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도록 하는 AI 기반 접근으로 설명했다. AI가 화면 안에서 답을 생성하는 단계를 넘어, 로봇과 설비를 통해 물리적 현장을 움직이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 한국 제조업, AI 적용 여건은 갖췄지만 확산 속도는 과제

한국 제조업은 AI 적용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주력 제조 대기업들은 이미 자동화 수준이 높고, 생산 품질과 공정 효율을 세밀하게 관리해왔다. 반도체 공정의 수율 관리, 자동차·배터리 생산라인의 품질검사, 조선·철강·화학 설비의 예지보전은 AI 적용 수요가 큰 영역이다.

현대차그룹의 최근 투자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6년 2월 정부·전북특별자치도와 새만금 혁신 허브 조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26년부터 약 9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5조8,000억 원은 5만 개 GPU를 갖춘 AI 데이터센터에, 4,000억 원은 웨어러블 로봇 등을 생산하는 로봇 공장에 투입된다.

정부도 제조 AI 확산을 정책 과제로 올리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26년 스마트제조혁신 지원사업에서 자율형 공장 30개, AI 특화 스마트공장 400개, 대·중소 협력 AI 트랙 20개 등 약 450개 과제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결함 탐지와 실시간 공정 제어처럼 의사결정과 실행을 AI가 지원하는 스마트공장 구축이 핵심이다.

한국의 스마트공장 정책은 이미 장기간 이어져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스마트제조혁신 이니셔티브가 2014년 약 250억 원 규모의 정부 예산으로 시작해 2025년 2,479억 원 규모로 커졌다고 평가했다. 2025년 예산의 약 95%는 스마트공장 도입에 배정됐고, 나머지는 데이터 인프라와 지역 AI 사업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이 같은 흐름은 제조 AI가 한국 AI 전략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이 범용 챗봇 경쟁에서 미국 빅테크를 정면으로 따라가기 어렵다면, 산업 현장에 AI를 깊게 심는 방식은 더 현실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중소 제조업 데이터와 인력이 병목

제조 AI 확산의 관건은 중소 제조업이다. 대기업은 자체 데이터와 인력, 장비 투자 여력이 있다. 반면 중소 제조업은 설비가 노후화돼 있거나, 데이터가 종이 문서와 엑셀 파일, 개별 장비 안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AI를 적용하려 해도 무엇을 수집하고, 어떤 공정부터 바꿔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AI가 제조 현장에서 성과를 내려면 데이터 표준화가 먼저 필요하다. 불량률, 설비 가동률, 납기, 에너지 사용량, 작업 조건 같은 데이터가 일정한 형식으로 축적돼야 한다. 현장 작업자의 경험도 함께 반영돼야 한다. 공정 조건을 모르는 외부 AI 솔루션만 들여와서는 생산라인의 실제 문제를 풀기 어렵다.

인력 문제도 크다. 제조 AI에는 AI 엔지니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공정을 이해하는 현장 관리자,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는 생산기술 인력, AI 모델 결과를 업무 절차에 반영할 수 있는 운영 인력이 함께 필요하다. 연구실의 AI와 공장의 AI가 다른 이유다.

정부 지원사업도 단순 설비 보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마트공장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AI 적용 전후의 생산성 변화, 불량률 개선, 에너지 절감, 납기 단축 같은 성과를 측정하고 축적해야 한다. 성공 사례가 업종별로 정리돼야 중소기업도 투자 판단을 할 수 있다.

# 한국형 AI의 첫 시장은 생산라인일 수 있다

제조 AI는 화려하지 않다. 범용 챗봇처럼 대중의 관심을 한 번에 끌기 어렵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 보면 효과는 더 직접적일 수 있다. 불량률을 낮추고, 설비 정지를 줄이며,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납기를 안정시키는 AI는 곧바로 손익계산서에 반영된다.

한국형 AI의 가능성도 이 지점에서 더 뚜렷해진다. 한국어 챗봇 하나로 미국 빅테크와 맞붙는 길은 좁다. 반면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철강, 화학 공정에 들어가는 AI는 한국 산업의 강점과 맞닿아 있다. 제조업 데이터와 공정 지식, 현장 인력을 AI와 결합할 수 있다면 한국은 범용 모델 경쟁과 다른 경로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제조업 기반이 곧 제조 AI 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조업은 출발점일 뿐이다. 데이터 표준화, 현장 인력, 산업별 AI 솔루션, 중소기업 확산 구조가 갖춰져야 제조업은 한국 AI의 실제 승부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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